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인간의 삶에서 예상대로 일어나는 일은 '죽음'뿐이다.
암4기 환자는 남들보다 좀 일찍 죽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2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이 암환자에게는 1년 안에 일어난다.
한편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병하겠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진단받고 처음 한 일은 버리기였다. 나한테는 소중했지만 내가 죽으면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냥 '짐(쓰레기)'이 될 만한 것들은 다 버렸다.
제일 먼저 책부터 버렸다. 내가 가진 책들은 나에게는 소중했지만 내 아이들은 읽지도 않을 것이다. 다 버렸다. 요즘에는 버릴 책이 많으면 전화하면 수거해 가시는 분도 있다. 그 중에 값어치가 있는 책은 중고책값을 쳐 주지만 내가 그 책들을 끌고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고 내려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버리는 것도 힘이 있을 때 버릴 수 있다. '다음'에 버려야지 하고 미루다가 언제 침대에 누울지 모른다.
그 다음에 버린 것이 주방용품이었다. 요즘은 다르지만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집들이를 집에서 했다. 따라서 손님용 그릇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 우리집에 누가 와서 밥을 먹을까? 손님용 그릇을 다 치웠다.
이제는 손님도 거의 오지 않지만 가끔 집에 손님이 오면 그냥 배달앱으로 '도시락' 시켜 준다.
결혼해서 몇 번 쓰지도 않은 손님용 술잔, 와인잔도 다 버렸다. 딱 우리 식구가 당장 쓸 주방용품만 남겼다.
이사를 하는데 이삿짐사람들이 그릇이 없다고 너무 좋아했다. 심지어 이게 다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다음은 옷이었다. 살 빠지면 입어야지 하는 옷들도 다 버렸다. 정장용 옷도 다 버렸다. 앞으로 남의 집 결혼식, 장례식에 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옷 장에 남은 것은 등산복과 병원에 갈 때 입는 계절별 외출복 뿐이다. 겨울, 봄가을, 여름용 한벌 씩이다.
병이 나고 나서 느낀 것은 등산복은 정말 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매일 입는 등산복은 지겨워서 가끔 버리고 새로산다. 옥션에서 사는데 생각보다 싸지만 튼튼한 옷들도 많이 있다.
그 밖에 나에게는 소중했지만 남편과 딸에게는 짐이 될만한 것을 모두 버렸다.
미술관 팜플렛, 광고지 등등 참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 그동안 쓰레기를 많이도 모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뒤지다보니 대학교 때 친구들과 생각을 나눈 노트도 있었다. 버렸다.
내 투병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렸다.
지금 남은 것은 내 개인 앨범과 가족 앨범인데 죽기 전에 모두 디지탈화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던 엄마의 처녀적 앨범까지 모시고 살 상황은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내 앨범을 보지 않는다.
그들도 자신들 삶의 부산물을 간직하는 것마저 버거울 것이다. 내가 버리고 가는 것이 맞다.
박스들을 뒤지다보니 초등학교 때 일기장과 독서장도 나왔다 결혼할 때 엄마가 친정집 복잡하다고 가지고 가라고 해서 가져 왔는데 솔직히 지난 30년 동안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버릴 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남편이 좀더 두자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으리라는 것을 남편도 알고 나도 안다.
일찍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초기에 많이 버렸고 그 다음부터는 먹는 것과 생활용품 이외에는 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책도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이북으로 샀다. 이제 내 삶에 예뻐서, 기념품으로 사거나 나중에 쓰려고 사는 것은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 책들이 또 쌓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없는 책들은 조금씩 사기도 했다. 언제 한번 정리해야겠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어머니는 유품 정리를 힘들어 하셨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심리적으로도 힘들어 하셨다. 죄책감도 느끼시고.
정리는 본인이 하는 것이 맞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사진과 기억할 수 있는 몇 개만 남기면 된다.
그리고 요즘에는 블로그라는 것이 있다. 아이들에게 물리적인 짐이 되지 않고 아이들이 생각나면 들려 볼 수 있는 디지탈 세계가 좋은 것 같다.
나는 발병 후 그전부터 가지고 있던 개인 블로그에 정성을 쏟았다. 아마도 시간이 넘쳐나서 그럴 거다.
어떤 때는 놀러다니는 사진을 올리는 블로그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내가 걸으러 나가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블로그 관리도 내가 나가 걷도록하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한다. 또 언젠가는 사라질 나의 기억을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는 것 같다. 블로그에 올리지 않으면 어디에 다녀왔는지 기억이 남지 않아 나의 그나마 남아 있는 시간이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면 기억이 나고 나의 시간을 붙들어 잡고 있는 기분이다.
남편은 내가 컴퓨터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동네방네 놀러 다는 것(?)을 권한다.
그러나 그렇게 블로그에 정성을 들이는 것을 보면 나도 아직 '기억되고자'하는 욕망이 남아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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