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 치료제를 먹는 동안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좀 불편할 뿐 그럭저럭 생활(자신의 나이에 20년쯤 더한 나이처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백금제 항암제나 탁솔계통의 독한 항암제를 쓰면 인생이 다 무너진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심리적 타격을 받는다.
나의 몸이 침대 매트리스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침대를 벗어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것처럼 느껴진다. 또 음식을 목에서 넘기는 행동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게 된다. 정신도 비몽사몽을 헤매게 된다.
독한 항암제는 나의 정신력을 모두 빼앗아 가버린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 같다.
그러면서 앞으로 남은 나의 삶이 이런 시간으로 이어진다면 오래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보호자에게 '이제는 놓아 달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미성년인 아이들을 두고 생을 마쳐야 하는 내 상황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어른이 될 때까지 옆에 있어 주지는 못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엄마라는 기억을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죽은 후 바랄 수 있는 것은 거창한 재산이나 업적, 이름이 아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특히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친정 엄마에게서 어릴 때부터 받은 교훈도 그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삶.
어릴 적, 아마도 중학교 시절에 읽은 청소년용 소설의 구절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남아 있다. 배경이 1930년대 미국 경제공황 때 이야기인데 주인공의 부모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농장에서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산다. 가족은 일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정착을 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딸에게 인생에서 영웅이란 큰 전쟁에 나가서 용감히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힘든 일상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시절에도 이 문장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는데 힘든 투병 생활에서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 속에서 침대에서 벗어나 한발자국 떼어 놓는 것이 나에게는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암4기 환자에게 거창한 삶의 계획이나 목표는 없다. 큰 애가 수능볼 때까지 병원 침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버티기, 둘째가 수능 볼 때까지 버티기, 내년에 개나리, 진달래꽃을 다시 볼 수 있게 버티기등이다.
삶에서 평범한 일상, 그것이 암환자들에게는 가장 소중하다.
진단 후의 삶은 내게 주어진 두번째 인생이자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물을 잘 만끽하는 것이 나의 의무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극심한 고통을 버텨서 완치되는 환자들이 꽤 있다. 그들을 보며 희망을 가진다.
항암제로 손톱 발톱 다 빠지고 온 피부에서 진물이 나오고 걷지도 못하는 상황을 견디고 완치된 분도 보았다. 불굴의 한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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