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의 제정신 유지하기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stayalive1 2020. 3. 26. 06:19

처음 진단을 받으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신경을 써 준다.

그러나 이 병은 다리 골절처럼 단기간에 끝나는 투병이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병생활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본인도 지치지만 가족들도 지친다.

배우자와 아이들의 삶이 나 만큼 힘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진단받았을 때 아이들이 고1,중1이었다. 대한민국의 교육체제에서 인생의 제일 중요한 시기였다.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엄마가 일찍 죽어 내 인생 꼬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은 남편이 전담하기로 하고 나는 내가 돌보기로 했다.

병원에 갈 때에도 웬만하면 혼자 가고 입원했을 때도 식판을 나를 기운만 있으면 보호자를 부르지 않았다. 입원시 본인이 식사 후 식판을 복도로 나를 기운만 있으면 실질적으로는 보호자가 필요없다. 부득이 보호자가 필요할 때는 친정 언니에게 부탁을 했다.  심지어 감마나이프 치료를 받을 때 의사선생님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간단한 시술이니 필요없다고 했다. 그래서 부르지 않았더니 방사선과에 데려다 주시는 분이 감마나이프하는데 보호자 없는 분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물론 집안 살림은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을 돌보아주셨던 손윗 시누이님이 계속 아이들과 나를 돌보아 주셨다.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좀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형님은 완전히 벼락을 맞으신 것이다. 형님의 은혜는 이 생에서는 갚지 못한다. 다음 생이 있다면 갚을 수 있을까?

 

그래도 남편은 힘들어 했다. 직장 생활하면서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써야 했고 경제적인 부분도 혼자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진단을 받으면서 우리 가족의 '정상적인 가족 생활'은 끝이 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처럼 보였지만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족 계획에 장기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암환자가 되면 혼자 노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

걷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니 혼자 걸어야 한다. 다른 암환자와 함께 걷는  것은 더 힘들다. 다들 예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칭이나 요가도 수련원에 가서 하기 힘드니 유튜브 보고 혼자 한다.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을 잡아도 컨디션이 시시가각 변하니 약속을 했다가 취소를 하기가 일쑤여서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친구들과 만날 때는 일대일 약속을 하지 않고 여럿이 만나기로 하고 당일 아침에 나갈 수 있는지 통보를 한다.

내가 나가지 않더라도 친구들끼리 놀라고 한다.

친구들을 집으로 오라고 하는 것도 힘들다. 멀리서 오랜만에 왔는데 나 피곤하다고 빨리 가라고 하는 것도 미안하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시간과 약속 강박증이 있던 사람이다. 시간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상대방에게도 미안하지만 나 자신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다. 발병 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그래서 혼자서 요가하고 걷고 박물관, 미술관 다닌다.

그래도 나 혼자 몇 시까지 나가기로 정했는데 그 시간에 출발하지 않으면 스스로 스트레스 받는다.

이 강박증은 언제나 고치려나......

 

요즘에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혼자 놀기 정말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집에서 움직이지 않고 책이나 TV, 인터넷 접속만 많이 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다.

그래도 무언인가 배우고 싶어도 인터넷에 다 있다. 심지어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인문학 강의도 널려 있다.

 

환자들은 온갖 이유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폐렴, 패혈증, 간염 때문에 장기간 입원을 했는데 이 때도 내가 식판 나를 기운이 있으면 보호자가 없는 것이 편했다. 왠지 누가 옆에 있으면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있었다. 보호자 식사도 신경써야 하고.

아마도 오랫동안 가족을 돌보던 습관 때문이리라.

혼자 있으면 운동도 열심히 하고(복도를 돌아 다닌다. 겨울 철에는 병원 만큼 운동하기 좋은 곳도 없다.) 심심하면 책이나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 된다. 또 나는 입원했을 때 방문객을 절대 받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걷고 싶을 때 걷기 위해서다. 방문객을 받거나 전화를 받으면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하는 경우가 많아 걷지도 못하고 지치기 때문이다.  방문객이 우르르 몰려 온 다음 더 나빠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 연락은 카톡이나 문자로 해서 내가 확인하고 싶을 때 보면 된다.

사실 방문객들은 궁금하고 위로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환자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오랜만에 병원에서 만나서 싸우는 가족들도 보았다. 그래서  환자 말고 가족 중의 한명이 맡아서 연락을 하고 전화를 받는 것이 좋다. 또 친구들 중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연락을 해서 나머지 친구들은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요즘에는 전화말고 그냥 카톡만 하는 것이 환자를 도와주는 길이다.

내가 입원했을 때는 저녁 때 남편만 잠깐 필요한 물품과 빨래를 교환하러 왔다갔다. 그리고 언니가 와서 맛사지를 해주러 왔다.

와서 말만하는 방문객보다는 실질적으로 주물러 주는 방문객이 환자에게는 필요하다.

 

환자는 고독과 친해져야 제정신 차리고 버틸 수 있고 가족들의 짐을 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