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쯤 옆구리가 약간 결리기 시작했다. 통증이나 기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몸을 움직일 때 약간 결림을 느꼈다.
그래서 7월 말에 근처 병원에 가서 전반적인 건강검진을 하고 8월 초 휴가를 뗘났다.
정말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친정 네 자매와 배우자, 아이들이 모인 휴가 였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휴가를 다녀 오고 검진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상이 있으니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부랴부랴 삼성서울 병원에 예약을 하니 20일 넘어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기다리가 2박 3일 입원해서 정밀 검사를 했다. 폐암이란다. 그것도 4기..........
그건 그냥 사형 선고였다. 암 중에서 폐암이 악성도가 높다는 말을 그동안 들어왔었다. 그런데 그것도 4기란다....
진단 받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진단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이 정도면 평균 얼마나 사냐고.
2년 6개월이란다. 그런데 폐암약은 계속 개발되고 있으니 새 약이 나올 때까지 버티면 된단다.
의사도 그나마 희망을 주고 싶었나보다. 본인도 환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겠지.....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오른 것은 아이들이었다. 큰 애가 고1, 작은애가 중1이었다.
2년 6개월 후면 큰 애가 고3 일 때다. 큰 애가 수능 칠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거동할 수 있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일 것 같았다. 작은 애가 대학 갈 때까지 사는 것은 욕심일지 몰라도 큰 애가 수능 칠 때까지 거동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목표인 것 같았다.
진단 받았을 때 내 인생이 아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삶에 큰 욕심이 없었다.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출세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먹고 살 만한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 하는 책을 힘들지 않게 살 정도의 돈이면 만족했다. 나는 명품에도 나를 꾸미는 화장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교육을 받았고 직업이 있었고 말통하는 남편을 만났고 예쁜 두 딸이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고 살았는데 엄마로서의 임무를 끝마치지 못하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아이를 나았으면 최소한 대학갈 때까지는 보살펴야 하는게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보다 정말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그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진단을 받고 그런 생각을 버렸다. 나는 50이 다 되도록 엄마가 있지만 그들은 이제 얼마 가지 않아 엄마가 없을 것이고 그걸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로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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