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환자들은 원래 겨울에 힘들다. 많은 분들이 겨울 내내 고생하다 2월쯤 사망하거나 재발을 경험한다.
봄, 여름, 가을에 체력을 비축해 놓아야 겨울을 무사히 보내는데 이번 가을에 코로나 걸린 후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걷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코로나 걸리고 난 후 심출성 중이염이 있었는데 고막에 구멍내고 관을 꽂으니 멍멍함도 사라졌다.
마침 큰 딸과 시간이 맞아 이번에는 함께 제주도에 가서 걷기로 했다.
그동안 겨울 제주도 여행은 늘 혼자 갔었다. 물론 때로는 동행이 있기도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었다.
나같이 체력이 약한 암환자들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편하다. 내 약한 체력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것도 싫고 또 동행을 의식해서 내 자신이 무리하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너무 체력이 떨어져서 혼자 가는 것이 좀 무섭기도 했다. 제주에 가는 것도 어느 정도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갈 수 있다. 체력이 너무 떨어진 상태에서는 그것도 무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 가니 기운이 좀 났다. 아마도 외부 기온에 크게 영향을 받는 체질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이번에는 딸과 함께 올레 18코스를 걸었다. 욕심내지 않고 쉬엄쉬엄 카페에서 쉬면서 걸어서 그런지 체력이 좋아져서 서울에 왔다. 바람이 너무 부는 날에는 몇몇 박물관을 돌아 보기도 했다.
체력을 비축해서 서울에 오니 다시 기온이 급강화하고 있다. 제주에서 저축한 체력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 모르겠다.
제주도는 암환자가 겨울에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특히 해변가 올레길이 최고이다. 올레길은 많은 부분이 차가 다니는 길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차가 다니지 않는 산길도 있지만 대부분 30분 내에 찻길로 진입할 수 있어 체력 떨어지면 바로 카카오택시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일단 공기가 서울보다는 따뜻하다. 나는 후드가 달린 스키 마스크를 쓰고 걷기 때문에 바람때문에 고생하지는 않는다.
또 적당한 간격으로 카페들도 포진되어 있어 좀 걷다가 폐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면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폐를 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가는 경우 걷다가 체력이 떨어져도 집에 가기 위해서는 몇 시간씩 계속 걸어야 하는데 암환자들에게는 위험하다.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폐는 계속 찬공기에 노출되는 것이다.
걷는 중에 체력이라는 것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확 떨어지는 것을 몇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겨울 걷기는 '게으르고 비겁하게 '하는 것이 좋다.
또한 겨울산행은 등에 진 짐의 무게가 여름보다 많아진다. 따라서 무릎, 허리, 어깨에도 무리가 많이 간다.
암환자의 걷기는 하루 이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평생해야 하는 것이므로 무릎, 허리, 어깨가 아프기 전에 미리미리 예방을 하는 것이 좋다. 겨울에는 무릎이 아프지 않아도 선제적으로 무릎보호대와 스틱을 사용한다.
올레길 걷기는 산행보다는 가벼운 짐을 유지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가능하면 맛사지를 자주 받고 요가를 해서 뭉친 근육들을 제 때에 풀어준다. 겨울에는 근육도 잘 뭉친다.
또 '체력 좋은 동행'들과 같이 다니지 않는다. 힘차게 걷는 그들을 보면 천천히 가는 내가 미안하기도 하고 '나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마음에 무리해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다가 '나의 몸'에 해를 가하게 된다.
암환자의 걷기 운동은 다른 이에게 나를 증명하거나 자존심을 세우거나 큰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욕을 얻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신체 대사 활동을 자극하기 위한 걷기이다.
걷는 것이 별 운동이 안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것도 너무 많이 하면 신체에 무리가 가고 우리 몸의 근육에 노폐물이 쌓인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근육에 쌓인 노폐물을 청소하고 손상된 근육을 치료하기 위해 체력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암세포를 억제할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쓰게 되는 것이다.
암환자들에게 겨울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계절이다. 춥다고 집에서 누워만 있었도 안되고 운동을 해야 하는 데 무리하면 확 가는 경우가 있다. 조심조심하면서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특히 나같이 폐가 정상이 아닌 사람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폐는 고온다습한 환경을 좋아하는데 겨울은 그 반대인 저온건조인 환경이다. 기온이 낮은 데 외기에 너무 오래 노출되면 운동의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 있다. 감기, 폐렴등의 부작용이 올 수 있다. 또 암환자는 체온을 높여야 한다는 기본 명제에 어긋난다. 몸은 옷을 따듯하게 춥지 않지만 폐는 들어 오는 차 기운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폐에 방사선치료를 받으면 공기가 코와 기도를 지나면서 좀 데워지는기능을 상실하는 것 같다. 사이버 나이프 치료 후 영하의 날씨에 노출되면 오른쪽 폐에 칼날이 들어 오는 느낌을 받는다.
암환자들이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보다도 폐렴을 극복하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나처럼 폐렴을 두번 정도 겪어보고 폐렴으로 입원할 때마다 저 문을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비겁하고 게으르게' 살게 된다. 암환자는 폐렴을 겪을 때마다 죽음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을 경험한다.
올레길을 걸으면서도 더 걸을 수 있는 체력이 있는 상태에서 미련없이 택시 타고 숙소로 와야한다. 겨울에는 자신의 체력의 60%만 쓴다는 생각으로 걸어야 한다. 내 경우 하루에 15000보 정도로 걷는다. 걸을 때 갤럭시 와치를 보면서 걸음수 확인하고 15000보 즈음에 큰 길로 나와서 카카오 택시를 부른다.
올레길도 걷다보면 경로를 안내하는 '빨간 파란 리본 찾기'에 중독되어 자꾸 더 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을 오를 때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목표의식이 '빨간 파란 리본 찾기'로 대체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15000보 넘었으면 과감하게 걷기를 중단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암환자가 정상인들보다 더 오래 많이 걸었고 체력이 정상인들보다 더 좋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 몸에 도움이 되는 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쓸데없는 경쟁심과 성취욕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경쟁 속에서 산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종종 잊기도 한다.
암환자들에게 겨울은 체력을 키우는 계절이 아니라 유지하는 계절이다. 떨어진 낙엽도 조심한다는 기분으로 조심조심 지내다가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는 6,7,8월에 최고의 체력으로 운동해서 체력을 비축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또 준비하는 것이다.
올레길을 적당히 걷고 남는 시간에는 소파에 뒹굴뒹굴 누워 TV를 보거나 스트레칭, 요가를 하는 것이 좋다.
식당에서 천천히 밥먹으며 시간 끌고, 천천히 걷고, 걷다가 만난 카페에서 차마시며 풍경 구경하고 숙소에 와서 스트레칭하다보면 제주에서의 하루가 다 간다.
작년까지만해도 제주도에 갈 때 번거롭게 폼롤러를 들고 가서 근육을 풀었었다. 코로나 전에는 가끔 제주도에서 맛사지를 받기도 했었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무서워서 맛사지 받던 것을 모두 끊고 폼롤러를 사용하였다. 올해에는 폼롤러 대신 작년에 새로 산 머슬건을 가지고 가니 짐도 줄고 효과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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