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진단 받고 해야 할 일

'암환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stayalive1 2024. 2. 18. 05:38

처음 암환자라는 진단을 들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심리학자 들이 흔히 말하는 심리적 5단계를 거치게 된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6672

 

암 1,2,3기 환자들은 이 시기를 빨리 거치고 곧 극복하지만 4기 환자는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에 빨리 극복하기가 힘들다.  수술을 하는 1,2,3기 환자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최장 1년 이내에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4기 환자는 '정상인'으로 돌아 갈 가능성이 거의 제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지난 12년 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 많은 4기 환자를 보았는데 병을 극복하고 직장인으로 돌아 간 환자는 딱 1명 보았다. 물론 그 분도 진단 전 화려했던 술과 담배의 삶은 포기했다. 그분은 진단 전 매우 건강했고 등산도 열심히 했던 남자분이었다. 기본 체력이 있는 분들이 항암도 잘 견딘다. 

 

4기 환자는 빨리 '수용'의 단계로 들어 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고 투병해야 예후가 좋고 오래 버틴다. 애써 정상인처럼 살려고 하다가는 자신의 삶을 깎아 먹는 것이다. 

가끔 50, 60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 중에는 4기 진단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분도 있다.  자신의 결정이 확고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다할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비겁하게라도 끝까지 숨 쉬는  것이 목표인지 확실히 노선을 정하고 그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면 된다.  중간에 노선을 바꾸면 힘들어지고 자신의 주변인들에게 원망이 간다. 

 

끝까지 버티겠다라는 방향으로 결정한다면 어떻게 투병해야 하는 지 결정하기 쉽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의무적으로 체면때문에, 사회 관계상  해야했던, 내 목숨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행동을 과감히 그만두게 된다. 

예를 들어 체면상 가야했던 친척, 친구들의 장례식, 결혼식 가지 않는다. 돈만 보내면 된다. 내가 가지 않아도 장례식, 결혼식 잘 할 수 있다.

시댁, 친정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시댁도 그렇지만 친정 식구 만나는 것도 스트레스를 준다. 분위기 맞추는 것도 스트레스다. 정상인이었을 때는 이런 행동을 했는데 지금은 못하는구나라는 자괴감, 더 이상 과거처럼 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한다. 또 부모님에게 투병 소식을 말하지 않은 경우 '정상인 척'하는 것이 환자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다. 당연히 제사음식 만드는 것은 체력적으로 엄청난 손상을 준다.  조상들도 암4기인 후손이 만드는 음식을 즐겁게 받을 것 같지 않다.  [Dr.나임일 Talk 15] 암 환자의 명절 증후군 https://www.youtube.com/watch?v=21am3Jo8-bY

 

나는 2월에 하는 딸들 졸업식에도 추워서 가지 못했다. 강당에서 하더라도 집보다 춥고 비교적 오래 추운데서 서 있어야 하는 것이 내게는 무리를 준다. 또 감기 환자들이 여기저기서 기침을 한다. 겨울은 암환자에게 힘든 계절이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그래도 꼭 하는 일은 아침에 아이들 깨워 학교 보내고 아침밥 차려주는 일이다. 그나마 반찬을 거의 사서 먹고 국도 사서 먹는다.  냉동국 해동해서 주는 것이다. 밥만 전기 밥솥에 꽂아 한다. 그동안 내가 하던 모든 일 중 이 임무만이 다른 사람에게 일임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체력이 더 떨어지면 아침밥 배송 시키기를 할 것 같다. 

그래도 내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이들이 돈 벌기 시작해서 독립할 때까지 숨 쉬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로서 할 일은 다 하는 것이다.  처음 진단 받았을 때는 '큰 아이 수능볼 때까지 집에 있기'가  목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휴일에 식구들이 모두 집에 있으면 한끼는 밀키트 사용하고 최소한 1번은 아예 시켜 먹는다. 하루종일 밥 차리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머지 살림은 대충하거나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린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나를 위해 쓴다. 하루 만보 걷고 스트레칭하고 맛사지 하면 나름 바쁘다. 우리 같은 사람은 걷는 것도 천천히 걷고 도중에 좀 쉬어주기 때문에 만보 걷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빨리 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정상인들보다 빨리 근육에 노폐물이 쌓이기 때문에 각종 스트레칭, 맛사지 시간을 늘여야 한다. 

 

또 4기라는 암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미리 알아두면 대처하기 쉽다. 병원에서는 투병의 마스터플랜 또는 경로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당장 쓸 항암제나 수술만 가르쳐 준다. 환자마다 투병 경로가 다 다르고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 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또 병원에서는 확실한 것만 말한다. 그래도 투병 카페에 들어가서 읽어보면 대충 어떤 경로로 나의 병이 진행되고 어떤 약을 쓰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감을 잡게 된다.

 

암4기 환자는 자신의 예후를 약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과잉진료를 해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그러나 이 부정적인 생각은 이성적인 부정적이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부정적이 되면 우울증에 빠져 치료를 포기하게 된다.)  의사샘이 세포독성 항암제를 6번을 하자고 하면 자신이 체력을 키워 그 이상 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6번이라 함은 그냥 평균값이고 내가 체력이 좋아 더 할 수 있으면 암세포를 더 제거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세포독성 항암제을 하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환자가 잘 버티고 효과가 좋으면 더 하기도 한다.  각 병원마다 최고 기록을 기록했던, 체력 좋은 환자들이 있다. 이 약을 써서 효과 있을 확률이 20%라고 했을 때 내가 그 20%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당연히 가정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플랜 B를 생각해 놓아야 한다.  

4기 환자의 항암은 수술 전 4회 또는 수술 후 4회로 정해져 있는 3기 환자와는 완전히 다른 경로로 간다. 

 

또 4기 환자는 현재 신약 개발 현황에 늘 신경 써야 한다.  미국 FDA에서는 허가를 받았지만 우리나라 식약청에서는 아직 허가가 나지 않을 경우도 있다.  미국과 한국의 허가 사이에 1년이상 기간이 있다면 4기 환자에게는 그 세월이 영겁의 세월이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에 쓸 약이 없어서 임상에 들어가면 미지의 부작용과 효과에 시달린다.  이쯤되면 의사들도 잘 모른다. 그래도 체력으로 버티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올라간다. 임상에 들어가서 고생해도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은 환자들도 가끔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체력과 인내심의 싸움이다. 

 

암 4기 환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빨리 받아 들여야 오래 버틴다. 

그리고 사회생활, 음식, 운동도 '정상인'이 아닌 '환자용'을 선택해야 한다.  정상인처럼 살다간은 자신의 쳬력을 깎아먹는 것이다. 

 

환자가 자신의 암환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보호자라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가끔 환자도, 보호자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허둥대는 분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