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 폐암4기 진단을 받고 2년 6개월 정도 예상 수명을 선고 받았었다.
그 이후로 나의 인생은 '잉여인간'이었다. 마치 선고가 언제 집행될지 모른 채 초조하게 사는 사형수 입장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그런데 올해 6월 나는 내가 봉사하는 그룹에서 비교적 중요한 직책을 맞아 중요한 행사를 무리없이 마무리했다.
'암환자는 봉사를 하되 중요한 직책을 맏지 않는다.'는 나의 원칙을 스스로 깨는 행위였고 행사 전 준비기간 8개월 동안 끊임없이 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며 참여했다. 내가 힘들면 내 일을 대신 맡아 줄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행사 기간 동안 무리를 하기는 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고 한달 동안 거의 누워지냈다. 다행히 나의 체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여름이라 회복하기 쉬웠다. 아마도 행사가 겨울이었다면 참여하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행사 정도의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를 주는 행사였다.
다시는 그런 일을 할 기회도 없고 할 의지도 없지만 암 진단 후 10여년을 살아남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암환자라도 버티면 단군 이래 제일 잘 사는 대한민국을 경험하고 초스피드로 발전하는 현대 IT 문명도 경험 할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네이버 클로바노트, 무료 OCR, ChatGPT도 이용하는 것도 배웠고 심지어 동영상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는 것을 배웠다. 심심하면 ChatGPT 로 영어 회화연습을 한다. 인공지능을 괴롭히는 것이다. 심심할 때 시간 보내기에는 최고이다. 또 저렴한 비용으로 OTT를 이용한다.
20대, 30대 때 녹취하면서 '이걸 쉽게 하는 방법이 있을텐데.'하는 생각을 했었고 또 책에 나와 있은 내용을 손으로 일일이 타자를 치면서 입력하면서 '이걸 쉽게 하는 방법이 있을텐데.'하는 생각을 했었다. 40대가 되면서 언젠가는 이 기술이 등장해서 누구나 쉽게 이용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드디어 나이 60에 '누구나' '무료'로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발명된 기술을 소수만이 독점하거나 비싼 이용료를 내는 시기는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또 영화 하나 보기 위해 미리 몇 일 전에 대한극장에 가서 예매하며 20대를 지낸 나로서는 OTT의 세계는 천국이다. 그 때는 예매하기 위해 줄을 섰었다.
또 올해 나의 삶에서 큰 전환점은 이제 활자중독에서 벗어나 '색칠하기', '그림그리기'로 변화한 것이다. 그동안 정성스럽게 관리하던 독서 리뷰블로그(1년 반만 더 있으면 20주년이 된다.)도 거의 중단하고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색칠하기' '그림그리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책도 열심히 읽었지만 그림도 열심히 감상했었다. 진단 받기 전에도 그랬고 진단 받은 다음에는 더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었다.
그런데 올해 시작한 색칠하기와 그리기는 또 다른 위로를 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초보자이므로 아직도 선긋는 것 조차 서툴지만 '색칠하기'는 초보자에게도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어 만족감을 준다.
그림 그리기에 들어가는 재료비가 아까워 스마트폰으로 그리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그리기는 지하철 안에서도 가능해서 더욱 좋다. 또 '되돌리기'라는 버튼이 초보자에게는 심리적 안정을 준다.
몇 달 동안 훈련 후 이제 선긋기가 덜 흔들리게 되었다.
또 인스타도 시작했는데 그곳에 내 그림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있다.
인스타에는 직업 화가들의 작품이 많아 감상하기에 너무 행복하다. 나는 초등생 수준의 그림을 올리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갤러시노트 산지 몇 년 되었는데 이제야 펜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 인스타는 알고리즘이 잘 되어 있어서 그림에만 영역을 한정하면 그림 관련 추천만 올라와서 좋다.
또 예전에는 걷기를 위해서 블로그를 열심히 했었다.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걷기를 하는 듯한 상황이 되어 걷는데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었다. 요즘에는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약간 시들해진 걷기에 매우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조회수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와 형제들이 열혈독자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지난 투병 기간 동안 나의 삶의 방식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바뀌었고 '싸게' 할 수 있는 경험을 가급적 많이 하려고 노력했었다. '잉여 인간'이 아니면 하기 힘든 삶의 방식이다.
유발 하라리는 책 '사피엔스'에서 미래에 로봇 때문에 수 많은 잉여인간이 발생하고 그들의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정통유대교들(하레디)와 비슷할 것이라고 했지만 잘 사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싸게', 그리고 '재미있게' 잉여인간으로 지내는 방법이 많이 있다.
또한 유발 하라리는 현재 전세계의 잉여인간들은 게임과 마약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지만, 그림그리기, 사진찍기, 뜨게질, 명상, 걷기등 '건전하게' 시간 보내는 방법도 많이 있다.
물론 동양인으로 토트넘의 주장이 된 손흥민이나 카타르 월드컵개막식에 노래를 부른 정국의 영상을 보면서 '국뽕'에 취하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요즘의 일은 정말 비현실적인 현상이다. 우울할 때 보면 정말 좋다.
앞으로 시간이 나면 엑셀을 잘 활용하는 것을 배우고 싶다. 단순 입력 수준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아내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 이것은 나혼자 동영상보고 배우기는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돈내고 배우기는 뭐하다. 백수가 뭐 쓸모있다고 돈까지 내고 배우나. 고민이다.
요즘에는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혼자 시간보낼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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